알아야 반박을 할 수 있다.
그만 거짓된 선동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1. 김대중은 연평해전을 무시하고 축구에나 참석했다
- 김대중은 사건 발생 직후 긴급 nsc 소집, 당연히 참석 예정이던 대한민국 VS 터키 4강전 불참
- 다음에 참석한 월드컵 폐막식도, 일본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위한 것. 오히려 이를 통해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본과의 공조를 이끌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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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방문중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1일 오후 도쿄 총리공관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포스트 월드컵' 대책과 북한의 서해 무력도발 사태에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9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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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제공격 금지 명령
- 이는 유엔사 교전수칙에 따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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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送船(방송선)납북 空軍作戰權引受(공군작전권인수)절실
1970.06.10동아일보 1면 정치 기사(뉴스)
공군기 편대는 이날 오후 1시 25분에 현장에 도착. 1시 37분까지 12분동안 목표물 포착을 위해 선회비행중 TACC로부터 "목표물 공격을 허가없이 하지말라" 는 경고를 계속 받고 있었던것으로 알려졌다. (중략)
이때문에 우리 공군기들은 북괴에 끌려가는 해군방송선과 북괴함 2척을 발견하고도 공격을 못한채 오후 1시 42분까지 선회비행만 하고 되돌아왔다고 한다
현재 우리공군에 적용되고있는 교전규칙에 의하면 우리공군기가 적기를 발견했을 경우에도 적기가 선제사격을 하지않는한, 먼저 사격을 하지 못하도록 돼어있고 연평도와 백령도 부근등 휴전선 및 그 해상 연장선 일대에는 허가없이는 출동조차 못하도록 돼있어 북괴가 이를 역이용, 도발했을 가능성마저있어 작전지휘권의 부분적인 이양및 교전규칙 완화가 시급하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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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절부터 마찬가지였으며
당시 해상에서 3번의 참사가 있었다.
3. 유가족들에 대한 경시, 보상금의 미흡
- 해당 장병들을 찾아가봤으며, 유가족들도 위로, 또한 보상금 미흡 문제는 박정희 정부 시절 만들어낸 법률 문제로 다른 방식으로 금전적 지원을 이끌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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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유가족등에 11억원 추가 전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225912
김대통령 서해교전 전사.실종자 가족 위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210560
- 영결식 불참
이는 군의 관례상, 의전상 문제라 한다
국방부 해명
총리실 해명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99634
이후 김대중은 직접 국군병원에 찾아와서 부상병들을 위로했으며, 제 4차 아시아 유럽 정상회담에 참여하러 가는 와중에 연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개방을 위해서 타국들의 협력을 바란다고 발언하는 한편 제2연평해전을 잊지 않고 세상에 떠난 고 박 상병이 세상을 뜬 것에 대해서 조의을 표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241769
4. 북한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
- 가까운 사건인 이명박 정부의 천암함 연평도 포격 때도 사과는 없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 당시에는 유감표명을 들음
이건 당시로써도 매우 이례적인것이라서 북한과 사이가 안좋은 미국과 일본정부까지도 환영한다고 했을정도입니다.
미ㆍ일 '북한 서해교전 유감표명' 환영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1743
물론 그 당시 우리나라 특정 언론과 단체들은 '이게 사과임?' 하면서 시큰둥했지만
이명박 정부때 천안함이 북한 어뢰맞아서 제2연평해전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고 연평도 포격으로 민간인들까지 희생되는 초유의 사건을 겪고도 북한에 보복을 해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런 사과표시나 유감표명을 받지도 못했는데 그건 아무말 안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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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1967년 1월에는 강원도 거진 동쪽 해상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우리 해군 초계 호위함(PCE-56, 650톤급)이 북한 해안포의 기습공격으로 침몰
승조원 79명 중 39명이 전사.
당시 해군 함정이 침몰당하고 거의 승조원 절반 (39명, 참고로 서해교전 전사자는 6명.)
39명이 전사한 이 대형 사건에 이후 추모제가 매년 거행되었다거나 추모비가 건립된 바를 알지 못함.
추모제나 추모비가 없는데 대통령이나 장차관 그리고 해군 참모총장이 참석할 수가 없지
다음은 1970년 6월에 서해안 연평도 부근 공해상에서 어선단 보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우리 해군의 120톤 급 방송선을 북한 해군이 공격을 해서,
승무원 20여 명이 대부분 사살당한 채 납치당한 사건이 있었음.
거의 같은 장소에서 우리 해군 함정이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에 20여 명의 생떼 같은 젊은 목숨이
어디 하소연 한번 하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사건 3년 후 당시 해군본부와 제대한 해군 병사들이 모금을 하여 당포함 충혼탑을 건립했고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올해로 40주년이 넘었고 이 기간 동안 고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역대 대통령 누구도 당포함 전몰장병 추모식에 참석한 적이 없음
마지막으로 1974년 6월28일에도 동해안 거진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 함정 3척의 공격을 받고 우리 해경 경비정 863함이 격침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음
참 이 사건을 보면 맘이 아픈 게…
기본적으로 당시 해경은 지금과 달리 장비나 훈련상태 그리고 기지의 시설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황이었고,
또 나중에 떠내려온 전사자들의 상태를 확인해 본 결과 최후까지 필사의 접전을 벌이다 장렬히 전사한 걸로 판단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인양된 시체 6구 모두 구명복 착용에 관통된 다리의 지혈을 위해 옷을 찢어 동여맨 채 발견되는 등 ..
현장의 격렬한 전투가 그려져서 맘이 이만저만 아픈 것이 아니지
게다가 사건 2주일 후에 전투 현장에서 163마일이나 떨어진 영일만에 김시오, 김원한 두 순경의 시신이 떠내려 왔는데
이 두 순경 분의 고향이 경북 울주군과 경북 영일군으로, 자신의 고향에 부모, 형제, 처자를 찾아 먼길을 떠내려 왔다고 해서,
유가족과 많은 사람의 맘을 참이나 아프게 했던 걸로 유명하다
나중에 해경에서는 1986년 12월 30일에 이 사건을 포함한 해경 창설이래 순직, 전사한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한다.
충혼탑 건립이 언제라고?
충혼탑 건립이 언제라고?
충혼탑 건립이 언제라고?
1986년… 박정희 대통령 사후 만 7년 후엡
그나마 이 충혼탑은 이후 역대 정부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가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절인 2002년 4월과 6월에 성역화 작업이 실시되고,
2003년 4월에 조경공사가 추가로 실시됨
http://kcg.go.kr/memorial/cms/content.jsp?&transparentory=menu_01&menuSeq=167&page=8
박정희는 더 심한 욕을 먹어 마땅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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